[기타] 남이 욕설과 비판을 해도 행복해지는 법

작성자
구재성
등록일
2011/07/04
조회수
9925

 

언제부터인가 악성 댓글로 인해 자살하고 우울증에 빠지는 연예인들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남의 얘기가 아니다 싶었습니다. 당시의 저도 이곳 모네타와 텐인텐 등에 칼럼을 올리면서 은근히 독자들의 반응에 민감했던 때였거든요. 선플이면 기분이 좋고, 악플이면 대범한 척하려 해도 은근히 뭔가가 치밀어 올라오기도 하면서 일일이 제 마음이 휘둘렸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그렇게 휘둘리게 되는 마음의 뿌리를 알게 되었으니 어떤 선악플에 대해서도 끄떡도 없는 경지가 되었습니다만 여전히 그 누구라도 그런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분들을 위해 제 경험과 수행에서 얻은 몇 가지 마음 다스리는 법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비단 인터넷 댓글 뿐만 아니라, 삶을 살면서 타인으로부터 받을 비판과 모욕, 욕설 등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다음 몇 가지 중에서 자신들의 근기(根氣/根機)에 맞는 것을 고르던지 모두 골라 써먹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방법으로는 타인으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을 때 그의 얘기가 욕설이건 모욕이건 비판이건 간에 그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즉, ‘아~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저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 라는 이해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틀리고 그가 옳다는 판정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하겠다’ 라는 이해심을 말합니다. 아무리 직위나 명예가 높고 지성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말이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聖人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라서 그가 설하는 모든 것이 진리나 道라면 모를까, 어떤 경우라도 그의 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즉 그는 다만 자기 까르마에 휘둘려서 자기의 기분과 생각을 내뱉었을 뿐입니다.

내 생각과 다른 언행을 하는 타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 받지 못하는 그가 손해인가요? 아니면 이해하지 못해서 갑갑하고 속 터지는 내가 손해일까요? 내가 그가 되어서 그의 입장을 이해하면 그가 좋을까요? 내가 좋을까요? 당연히 이해하는 내게 이롭고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가는 놈이라면서 내젓지 말고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이해를 해야 내가 더 이익이 됩니다. 이런 정도의 이기주의가 되어야 똑똑한 이기주의라 할 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로 살면서도 결국은 자기가 손해 보는 이기주의만을 고집하고 있지요.

어리석은 중생이자 철없는 양이 내뱉은 그의 소리를 굳이 애써 주워담아서 마음까지 휘둘리는 것은 내가 그와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입니다. 노예(종, 하인)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남의 욕설에 내가 휘둘린다면 나는 그의 노예입니다. 자식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성질 내고, 내 맘대로 안 되는 배우자 때문에 열 받아도 역시 상대방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의 사정으로 그런 생각을 일으키고 그런 언행을 표출할 뿐입니다. 그가 나를 열 받게 하려고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요, 부모가 짜증나게 하려고 성적이 나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남은 나를 하찮게 볼지 몰라도, 나 자신은 천하에 가장 귀한 존재이자, 나를 지키고 사랑할 존재는 오직 나 뿐인데, 왜 타인이 던진 쓸데없는 말을 주워담으며 자신을 괴롭힙니까? 이런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가장 귀한 존재임을 알아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줄 아는 법입니다. 

 

둘째 방법은 상대방의 말에 휘둘리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한테 ‘너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좌빨이야, 못 생긴 X이 성격도 더럽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무척 나쁠 것입니다. 이 때 마음 깊숙이서 치밀어 올라오는 불쾌한 기분을 딱 알아챌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분의 정체는 바로 우리가 자존심이라고 알고 있는 소위 ‘명예욕’입니다. 예로부터 세속적인 기준에서는 돈이나 지위, 권력 등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는 손가락질 하고, 명예를 지킨답시고 죽음을 자초한 선비들에 대해서는 높이 추앙합니다만, 저처럼 마음공부를 통해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쪽에서는 물질욕이나 명예욕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자신을 괴롭히는 욕심일 뿐입니다.

이럴 때에는 누군가의 욕설과 모욕으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올라오려는 무의식적 욕구를 재빨리 바라봤으면 이렇게 놓아버려야 합니다. ‘아! 나는 항상 내가 잘났다,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옳다, 그래서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욕먹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집착을 하고 있구나’ 라면서 알아차리고 잡고 있던 그 집착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즉 잘났다거나 옳다고 할 ‘나’가 누구인지, 명예, 인기를 추구하는 내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참구(參究)해보면 누구에게 욕을 먹던지, 칭찬을 듣던지 그에 반응할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깨달음이 있다면 어지간히 모욕적인 상황에 닥쳐도 금방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선지식들께서는 나는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지만, 나를 귀하게 할 사람은 나 자신일 뿐, 세상 어떤 것도 나를 비천하고 존귀하게 할 아무 것도 없다는 이치를 깨달으면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답니다.

모든 희로애락은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기쁠 때를 들면, 누가 기쁘게 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남이 만들어준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 나를 기쁘게 하던 사람이 죽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기쁘게 하던 사건이 줄거나 없어지면 그 기쁨만큼의 허탈함, 상실감으로 슬픔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기쁨을 얻도록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서 행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스스로 기쁨을 만들기 위해 밭에 나가서 커가는 내 새끼들(작물)을 바라보거나, 들과 뒷산의 꽃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고, 겨울에는 추위를 견뎌내는 나무와 겨울새들, 겨울을 나는 파, 배추 들을 보면서 감동에 가까운 기쁨을 찾습니다. 돈도 안 들고 항상 주위에 있는 것이니 거의 광대무변한 기쁨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짜증이 생기면 치밀어 올라오는 무의식을 들여다 봅니다. ‘나 잘났다는 이놈이 또 고개를 쳐드는구나. 이놈이 잠에서 깨면 나는 이놈에게 져서 귀하지 못한 천한 존재가 된다. 가장 천한 이놈아 저리 가라. 훠이~’ 하면서 내쫓곤 합니다. 처음에는 몇 일 지나야 그 놈에게 진 것을 깨닫고 더 짜증이 나곤 했지만, 재차 연습하다 보니 지금은 3초도 안 걸리고, 큰 사건을 맞이해도 10~20분이면 그 악마를 퇴치합니다. 언젠가는 순간 찰나에 퇴치하도록 정진 중입니다. 도무지 타인 때문에 나를 화나게 해서 자신을 해칠 일이 없습니다.

 

셋째 방법은 욕하는 상대방의 ‘욕할 자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헛똑똑인 사람들은 이 것을 잘못 적용해서,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욕할 자유도 있으니 서로 자유롭게 욕하자~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면 근기가 약한 사람은 참지 못하고 ‘이 인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막장까지 가자는거야! 라면서 크게 싸우자고 할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지혜로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도 내 마음에 안 맞으면 욕을 하던지 뒷담화를 하는데, 그 사람이라고 욕할 자유가 없을까? 나도 내 자유가 소중한 만큼 그도 자신의 소중한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주자~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훼손당할 각오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인정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신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여러분들이 일상의 어지간한 다툼 속에서 누구나 쉽게 적용할 수 있긴 하지만, 심각한 지경에 부딪힐 때에는 감히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런 정도의 마음가짐은 임기응변의 마음다스림은 되지만 근본적인 자기변화에 다다른 수준은 못되기 때문입니다.

 

넷째 방법은 자기 최면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저기 멀리 보이는 산 속의 한 그루 나무나 뛰어 다니는 다람쥐, 새나 벌레와 마찬가지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들은 누가 칭찬해도 알아서 잘 살고, 욕을 해도 알아서 잘 살아갑니다. 새와 나무 풀, 벌레들이 말다툼하다가 싸움을 했다는 말 들은 적 있어요? 화나고 억울해서 자살했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 있나요? 이 방법은 두 번째 방법과 일맥상통합니다만, 자기가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나마 자기만 자기를 높이 평가하고 만족하면 될 것을, 남도 자기를 인정해줘야 한다, 나를 아끼고 높이 평가해줘야 한다며 상대에게 요구합니다. 바라는 바가 있으면 그게 미움의 씨앗이 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에게 바라는 바 없이 다만 그 아름다움을 즐기니까 다툼이 없잖습니까?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하거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은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즉 타인의 평가에 따라 내 중심이 흔들리는 것은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평가해주는 그 사람도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사는 주제에 어떻게 다른 사람이 어떻다~라고 객관적 평가를 한단 말입니까?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인사고과를 한다고 할 때 점수를 매기는 상사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도 못하지요) 그저 회사의 이익과 부합하는지에 대한 평가를 할 뿐입니다. 돈과 지위에 집착하여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인사고과에 목을 매겠지만, 회사는 그저 일을 통해 자아를 성취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연례행사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평가를 나쁘게 받아서 일을 못할 정도면 어떻습니까?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하면 됩니다. 이직할 만한 회사가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꼭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자아를 성취할 수 있는 일거리는 천지에 널리고 깔려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4가지 방법을 소개해 봤는데요, 이 방법들은 제가 상황에 따라 적용시켜 큰 효험을 본 것들입니다.

문득 자신의 존재와 나아가 뭇 생명에 대한 존재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보면, 존재라고 할 만한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욕먹을 나도 없고, 칭찬받을 나도 없으며, 지구를 지배하는 잘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길어야 100년쯤 사는 것일 뿐, 아무리 애를 써도 오바마, 이명박, 김태희, 메시, 이건희, 예수와 석가모니 모두가 결국은 地水火風으로 스러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인기, 명예, 부,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그것을 붙잡겠다며 별 짓을 다합니다만, 여러분들 모두 저 같은 촌부보다도 자유롭고 행복한지는 의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는 삶을 살아봅시다. 과거를 붙잡는 것은 아직도 꿈에서 헤매는 것이요,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지금 걱정할 만한 일이 겪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생긴 걱정일 뿐입니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해서 실체를 실체대로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별 것 아님을 알면 과거에 머무를 필요를 못 느낍니다. 미래의 일은 그저 닥치면 그에 맞추어 할 뿐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면 남이 욕을 하건, 상사가 꾸중을 하건, 사업이 부도가 나건 농사가 잘되건 못되건 문제될게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는 일이 즐겁고 세상에 대해서도 좋은 일을 하겠다는데, 어떠한 문제도 문제랄 게 없습니다.

까짓 거 회사에서 잘리고 사업 쫄딱 망하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우리나라는 먹지 못해, 입지 못해서 죽는 나라는 아니잖아요? 이 정도만 해도 이 나라에 태어난 것에 감사할 일입니다. 확률상 제일 희박하다는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난 바에야 죽기 전까지는 자기를 제일 귀한 존재로 만들어놔야 언제 죽더라도 죽을 맛이 나지 않겠어요?

끝으로 위 4가지 방법을 쉽게 이해시켜 줄만한 한 석가모니의 일화가 있어서 이를 소개하고 마칠까 합니다.

 

--- 2,600년 전의 인도는 신분차별이 극심했던 곳이라 만물동체대자비를 펴려는 부처께서 가는 곳마다 기득권세력의 저항과 욕설, 모욕이 심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탁발을 하려고 어떤 바라문의 집에 이르러서 그 집 주인이 또 대놓고 욕설을 퍼붓자 부처께서는 빙긋이 웃으며,

“바라문이여. 그대에게 손님이 오면 그 손님이 선물을 하기도 합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손님의 선물을 받으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당연히 내 것이 되겠지”

“그 선물을 받지 않으면 누구의 것입니까?”

“그럼 도로 손님의 것이 되지 않겠소?”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나에게 욕설을 선물했는데 내가 받지 않으면 그것은 누구의 것이요?”

그 말에 바라문은 문득 깨달음을 얻고 그 자리에서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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