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프랑스 혁명과 아시냐 지폐

작성자
하상주
등록일
2008/10/20
조회수
8027

프랑스 혁명과 그 진행 과정 그리고 마무리 과정에서 화폐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마도 역사적 주요 사건 중에서 가장 많이 화폐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먼저 프랑스 혁명의 전체 과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시작하여 1799년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일단 막을 내린다. 즉 이 글에서는 이 10년의 과정만을 대상으로 한다.

 

루이 16세가 왕위를 물려받은 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바로 재정 적자를 메우는 일이었다. 그 전에는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공채(국채)를 발행했는데 국채 발행량이 점점 많아지자 정부가 국채 상환을 중단한다는 소문과 함께 더 이상 국채가 팔리지 않았다.

 

즉 과거에는 재정적자를 일부 계층의 힘으로 해결해 왔으나 이제는 전 국민에게 호소해야만 할 상황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왕은 1789영 5월에 1614년 이후 열리지 않았던 3부회의(귀족, 사제, 평민-평민이라고는 하나 대부분이 부르조아들이다)를 소집한다.

 

의회 내에서 부르조아의 세력이 자꾸만 커지자 왕은 삼부회를 은밀히 해산하려고 시도했고, 왕실군대와 민병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파리 시민들은 무기류를 구하려고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었다. 루이 16세가 왕위에서 내려오고 삼부회는 국민의회로 이름을 바꾸어 제헌 작업을 시작했다.

 

 

1791년 8월, 국왕부부가 파리를 탈출하려다 붙잡힌다. 왕당파의 귀족들이 하나 둘 파리를 탈출했다. 그 뒤 봉건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다가 1791년 9월에 공화국으로 바뀌었다.그 뒤 주변의 입헌군주국 또는 군주국들과 전쟁상태로 들어갔다. 그리고 내부에서는 반혁명세력이 등장하자 혁명세력들은 공포정치로 대응했다.

 

1793~94년은 공포정치였다. 1794년 공포정치의 주범인 로베스피에로가 길로틴으로 사라지고 그 뒤 계속 아시냐 지폐와의 전쟁이 계속되다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성공으로 혁명정부는 다시 군주정으로 돌아갔다. 

 

 

아시냐 지폐와의 전쟁 과정

 

1788년 필요 경비는 6억3천만 리브르였으나 세입은 5억 리브르로 적자가 1억3천만 리브르였고, 여기에 국채의 원리금 상환액이 3억2천만 리브르 더 필요했다. 산업활동이 정지되었으며, 실업자가 절반 이상이었고, 최악의 흉작으로 빵값이 급등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르조아는 삼부회 소집을 요구했다. 삼부회는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파괴이후 이름을 국민의회로 바꾸고 재정적자 상태를 해결하려고 고심했다. 그러다 나온 의견이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고 이 토지를 팔아서 적자를 메우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적자를 해결하고, 한편으로는 과잉 통화량을 흡수하기 위해서 의회는 아시냐라고 불리는 지폐를 발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유화된 토지를 구입하려면 반드시 아시냐 지폐로만 할 수 있다고 했다.

 

일부 사람들은 지폐의 발행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1720년대, 즉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에 존 로가 화폐로 지폐를 발행하려는 실험을 했다가  물가만 엄청나게 올려놓고, 그리고 주가 거품과 붕괴를 만들어내고는 사라진 사건을 예로 들었다.

 

1789년 10월, 4억 리브르의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여 그때까지 지불하지 못한 부채를 갚았다. 이리하여 잠시 조용해 졌으나 그 뒤 계속해서 재정은 적자상태였다. 그래서 매년 다시 아시냐 지폐가 발행되었다. 특히 1791년에는 아시냐 지폐의 가치 하락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시냐 지폐의 가치가 떨어져도 더욱 더 많은 발행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1793년 1월에 루이 16세가 길로틴으로 가고, 1794년 7월 공포정치의 주역인 로베스피에르도 길로틴으로 갔다. 1792년 11월 프랑스 군대가 벨기에를 함락했다. 사람들은 이제 아시냐 지폐를 벨기에에 주고 벨기에 주화와 금 그리고 각종 자산을 프랑스로 가지고 올 것으로 기대했다. 프랑스는 혁명의 전파라는 주제로 주변국과 전쟁을 했으나 실제로는 돈 때문에 주변국을 약탈하고 있었다. 그래서 벨기에의 일부 혁명 지지파들은 해방자로 자처하는 프랑스에 강한 분노를 느겼다. 그 뒤 결국 벨기에에게 패하고 오스트리아에게도 패배했다.

 

가격이 계속 올라가자 의회는 어쩔 수 없이 곡물에 대한 가격 통제를 실시했다. 그러자 농산물이 시장에 나오지 않아 값은 더욱 올라가고 암시장이 별도로 만들어져 그곳에서 주로 거래되었다. 1795년 연초에 1아시냐가 은화 22%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연말에는 겨우 은화 0.125%의 가치만을 갖게 되었다. 즉 아시냐 지폐는 구매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가게앞에 줄서기, 농산물 숨기기, 연금 생활자 자살 등의 현상이 일어났다. 이는 마치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하이퍼인플레이션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한 사건들이다.

 

1795년에 앞으로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나 그 뒤 몇달뒤 오히려 이 지폐를 법화로 지정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아시냐 지폐를 소각하는 등 지폐의 양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계속해서 업청난 지폐를 쏟아내었다.

 

드디어 정식으로 1795.12월 아시냐 신규발행을 금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그리고는 1796년2월에 새로운 지폐인 "망다"를 조금 발행했다. 그리고 망다의 가치를 보증하기 위해서 정부토지를 매각했다. 그러나 이 망다 역시 1796.8월에는 명목가치의 3%로 값이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점차 지폐의 발행량이 줄어들자 물가상승도 수그러 들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799.11.11일 나폴레옹이 큐데타에 성공하고 프랑스는 다시 군주정으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환지폐를 발행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지켰다.  

 

이런 과잉 지폐발행으로 온 물가상승과 자산 가격의 상승으로 몇몇 사람들은 센느 강에 자살하기도 했다. 이정도는 아니지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의 소수는 많은 돈을 대출받아서 올라가고 있는 자산을 사서 엄청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어쩌면 이들이 아시냐 지폐의 발행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속해서 아시냐 지폐의 양을 늘려가면서 발행하자고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글쓴이 : 하상주 투자교실 대표 하상주  l    http://www.hacla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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