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타협... 그러나 '참여' 합시다

작성자
손기혁
등록일
2009/06/01
조회수
8331

그를 존경하고 우러른 유일한 이유.

그는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재테크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람은, ‘극히 일반적인’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의 <타협>을 해야 합니다. 대학을 선택할 때에도, 직장을 잡을 때에도, 결혼이나 사랑 등등 우리는 각자의 ‘꿈’과 그렇게 몇십 몇백번의 타협을 해야 합니다.

 

재테크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행복하기 위해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극히 일반적인’사람들이 각종 성공스토리로 도배된 <소수의사람>들과는 다른 삶입니다.

그러한 타협을 스스로 하지 못하면, 시기하거나 오해하고 온통 불만투성이의 삶이 될 뿐입니다.

 

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뼈를 깎는 노력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필요한 법입니다.

 

예전부터 그러한 희생을 감수할 용기도, 노력할 자신도, 타욕에 물든 혼탁한 신념을 가진 나로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 나와 ‘타협’했습니다.

그리고 한번도 그렇게 타협한 나를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만큼의 그릇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나타났습니다.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아주 흥미로운 TV프로를 보는 것처럼 그는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해내는 모든 일들이 너무 통쾌하고 즐거웠습니다.

 

그는 끝끝내 타협하지 않은 상태에서 ‘벽’을 넘고서 만인이 우러르는 자리에 오르고야 맙니다. 나는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궁금하기 시작했습니다.

‘벽’에 의해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국민들의 대다수가 그에게 등 돌릴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타협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몇 번의 고비를 그렇게 넘기다가 결국 5년이란 시간은 끝나고 맙니다.

여기서 나는 그의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끝이 날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에겐 더 이상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리에서 물러날 때 조차 역대 ‘다른 사람들’ 처럼 힘을 남겨두는걸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가 마침내 타협을 하고 맙니다. 처음에는 고작 문서쪼가리 때문에, 그의 타협하지 않는 신념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모조리 고통 받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건 다음 그의 타협대상은 더 이상 ‘벽’에 대한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한번도 용납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해버린 것이죠. 신념을 꺾을 수 없는 그가 자신의 생(生)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나의 타협에 의한 신념이 한없이 부끄러워 짐을 느끼며 그는 또 한번 내가 바라볼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몇 일간을 그 충격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면서 많이 방황했으나, 곧 나는 또다시 나와 ‘타협’하고선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나는 원래가 그런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치솟는 뜨거운 것이 이성을 마비시켰으나, 지금은 식혀버린 나를 질책하거나 반성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몇 백번 동안 내 스스로에게 타협한 ‘나의 꿈’은 <우리 네 식구의 행복>입니다.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나는 소위 ‘노빠’라고 한번도 불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힘찬 발걸음에 박수를 보냈으나 등을 밀어주진 못했습니다. 나는 우리 네 식구의 행복을 지키기에도 버거웠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 누군가가 그의 길을 걷겠노라고 한다면 말리거나 미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상처받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상처는 ‘나의 행복’에도 영향을 끼칠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국민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이념입니다.

제대로 된 국가의 주인역할을 하려면 국민으로서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본이 곧 행복의 척도임을 부인할 수 없는 이 사회는 또한 많은 희생과 노력을 나에게 강요합니다.

 

나의 노력과 희생이 한쪽이 부족해지면, 지금처럼 존경하는 누군가를 잃고 오열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한쪽이 부족해지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큰 짐을 지울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그래서 스스로에게 타협을 합니다. 큰 꿈을 지우고.. 큰 기대를 작게 만듭니다..

 

 여러분들도 나처럼 ‘비굴해 보이지만’ 그렇게 타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적습니다.

‘스스로와 타협’하는 문제를 거론하는데 있어서 아마 좋은 예는 결국 그렇게 자기에게 타협하지 않은 끝에 엄청난 성공을 거둔 스토리일 것입니다.

굳이 위에 ‘부모님보다 더 존경했던 유일한 사람’의 일을 언급한 이유는 그만큼 [타협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하며, 힘이 들고, 무모한지를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더더욱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또한 이 글을 적습니다.

두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날 수 있도록 부모로서의 어려움에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모한 투자, 무모한 부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않도록 나를 포함 나를 만나는 모두에게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타협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일은 우리 서민에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한번 낮추어 놓은 나에 대한 타협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그러한 기대치가 높은 가운데 그 신념을 꿋꿋이 이겨내는 이를 우리는 ‘영웅’으로 부르며, 이르지 못할 벽을 인지(認知)하고 타협한 신념을 지켜내는 이를 ‘성인(成人)’이랄 수 있습니다. 신념과 타협도 없이 이르지 못할 벽만을 바라보는 자를 ‘멍충이’라 할 수 있으며, 기대치는 낮추었으나 신념을 지키지 못하는 자를 ‘무능력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멍충이’와 ‘무능력자’들은 자신이 ‘영웅’인줄 착각합니다.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내 그릇을 보아야 합니다. 큰 그릇에 아무리 꿀을 부어도 그것이 넘칠 리 없습니다. 작은 그릇에서 넘칠 듯 말듯한 것이 곧 행복입니다. 작은 그릇을 한탄하기만 한다면 결코 큰 그릇에 가득 들어찬 이들을 바꿀 순 없습니다.

  

386이하 소위 의식있다는 젊은이들이 소위 민주주의(democracy)에 대해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단 한번의 투표로 자기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 생각하지요. 민주주의는 참여입니다. 단지 투표권의 행사만이 참여가 아닙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 시작했던 지자체가 부패해버린 이유는 대다수의 국민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의 구,시의원이 누군지도 모르며 공약으로 내건 사항에 대한 결과보고회에 참석해본 사람은 아마 손에 꼽을 것입니다. 아니 정치를 떠나 그 축소판인 ‘부녀회의’조차 참석하는 사람은 결국 ‘부녀회’사람들 뿐입니다. 촛불을 들어보았을 뿐 자신이 속한 구역의 정치수장에게 전화해본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인과 국민들간의 괴리는 금융회사와 투자자와의 사이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집단화 되어가고 권력화가 되어갈수록 집단의 정점이나 그 단체는 그 기둥을 받치는 대다수의 의견과 멀어지게 됩니다. 국민(투자자)들은 그를 대리(代理)해주는 자들을 뽑았지만(운용을 맡겼지만) 단지 ‘잘 할거야’라는 믿음만 가질 뿐 그 이상의 참여는 하질 않습니다. 그렇게 고인 물은 당연히 썩게 되는 법입니다.

 

“이 상품이면 다 된다고 (혹은 오를 거라고) 했는데 말짱 거짓말이더라~”,

“정치인(금융회사 다니는 놈들)이 다 그렇지 머~”

 

‘정치’란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정치인은 곧 ‘다스리는 사람’, 정치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스려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릴 사람을 뽑지만 그 결과에 따라 다스려지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소위 ‘머리에 피가 마른’ 우리들은 결코 다스려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독선적인 정치 아이덴티티는 결국 ‘무참여’ ‘외면’ 으로 이어집니다. 당연히 그 정점의 수장은 더더욱 부패하게 됩니다.

 

앞서 지자체 의원의 결과발표회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몇 천명, 몇 만명씩 모인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신이 끌고 온 측근 몇 십명만을 앉혀놓은 자리에서 어영부영 결과 발표하는 것과 몇 만명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입니다. 결국 이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는 우리가 조정하는 것입니다. 규모의 경제학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금융상품이 발전하는 이유는 금융사들이 좋은 인재를 얻어서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의 금융상품에 싫증내고 더 나은 금융을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좋은 인재가 캐치하여 반영하는 것이죠.

 

금융상품의 발전은 모두가 바로 ‘수익률’로 체감을 하므로 아주 빨리, 좀더 복잡하게 바뀝니다. 하지만 정치의 이득은 그렇지 않죠. 그것은 아주 천천히, 채 느낄지도 못 할만큼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투자하는 여력은 더 힘들어 보입니다.

  

TV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애꿎은 희생에 대해 눈물 흘리고, 부당함에 분노하고, 잊지 않는 것 만으로 정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386세대 이하 우리세대들은 ‘머리에 지식은 있으되 절대 행동하지 않는’ 헛 똑똑이들 뿐입니다. 그리고선 자기가 최고 잘난 줄로만 압니다. 그러면서 무작정 특정 세력을 지지하는 노년세대에게 원망을 보냅니다. ‘아무 생각 없다’면서 말이죠.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것’과 ‘아무 행동 없이 머리로만 말하는 것’은 하등 차이가 없는데도 말이죠.

 

정치에 참여한다는 건 귀찮습니다. 그러면 ‘굴욕적이지만’ 타협해야 합니다. ‘나 말고 누군가 해주겠지’라는 고루한 등 떠밀기는 노력 없이 주식과 부동산의 대박을 기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타협을 했더라도 다스려짐은 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희생 덕에 대한민국은 또 한 단계 올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우리 서민들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자신 자신을 ‘희생’하라고는 감히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언제간 또 영웅은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살지만 우리를 대신해 모든걸 희생해줄 영웅을 우리는 기다릴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이니까요.

근 2년간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2천p를 경신하는 기염을 토한 반면 700p까지도 내려앉는 처참한 역사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지금은 1400p가 되었습니다. ‘누구 땜에 못살겠다?’ 누구의 탓이라기 보단 이것도 곧 경제의 역사일 뿐입니다.

 

새로운 영웅이 탄생될 때에는 지금보다 조금만 더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타협하면서 사는 우리지만, 그때가 오면, 가족과 인생, 부와 명예를 쫓으면서도 아주 조금만, 진정으로 참여하며 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타협하면서 기다렸으면 좋겠습니다. 다시는 이렇게 가슴 무너지는 억장의 피눈물을 쏟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몇 일간 넋이 나간 상태에서 고작 당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은 것이

글쓰기였을 뿐임을 애통해 하면서 가시는 길에 이 글을 바칩니다.

 

목록